Study/심리학자

[칼 구스타브 융] EP1. 생애 (+프로필)

윤_토피아 2021. 9. 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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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홍쌤의 상담교실 홍쌤입니다!


오늘의 심리학에서 만나볼 인물은 입니다.
[ 목차 ]
1. 융의 프로필
2. 융의 가족관계
3. 프로이트와 융의 관계
4. 융의 아내 '엠마'
5. 심리학자 융



1.
융의 프로필

MBTI 검사 받아보신 적 있나요??
MBTI는 성격유형검사 중 대표적이고 유명한 검사입니다.
MBTI는 융의 의식방향과 정신기능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융의 풀 네임은 칼 구스타브 융입니다.
1875년 7월 28일에 스위스 바젤 시골마을에서 융이 태어났습니다.
융은 의사, 정신의학자, 정신분석가, 교수, 학자, 저술자, 사회비평가 등 다양한 직업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가장 대표적으로는 의사와 심리학자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2.
융의 가족관계

융의 집안은 의사와 종교인이 많은 명망한 집안입니다.
융의 가문은 본래 독일 마인츠에서 살았지만, 유명한 정신의학자였던 할아버지 때에 스위스 바젤로 이사하여 이후 스위스 국적을 갖게 되었습니다.
할어버지께서는 바젤대학교 의과대학 학장이자 의사셨습니다.
융의 외할어버지께서는 개신교 목사 협회장이셨고, 융의 아버지 또한 개신교 교회 목사셨습니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융은 어린시절 기독교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 졌지만 융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로 목사인 아버지와의 관계도 좋지 못했습니다.






[ 융의 아버지 ]
융의 아버지는 대학교에서 고대 히브리어와 아랍어를 공부하며 문헌학 전공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학자의 길로 가지 않고, 가난한 시골목사가 되어 농부들과 그 아이들을 보살폈습니다.
자상하고 친절하여 신도들의 사랑을 받았으나, 실패에 대한 자책과 종교적 신념에 대한 명상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며 가정적으로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융의 아버지께서는 정신병원 상담목사로도 활동하였습니다.
비록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않았지만 정신병원 상담 목사로 활동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후 정신분석을 접하게 됩니다.

[ 융의 어머니 ]
융의 어머니는 쾌활하고 소탈한 성격을 지녔으나, 무서울 정도의 예리한 직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는 정서장애와 우울증으로 인해 요양원 생활을 하셨습니다.
장기간의 입원으로 인해 융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융의 어머니께서는 융이 태어나기 전 반복된 사산으로 우울증을 앓았으며, 요양원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민한 기질을 가지고 있던 융은 어린 시절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융은 심령 현상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자신이 두 가지 인격으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융은 거짓으로 신경증을 일으켜 학교를 빼먹기도 하였습니다.

소년시절, 프로이트는 발작증세를 앓았는데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가 나누는 대화르 엿듣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 융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많은 재산을 사용했고, 아들이 평생 돈을 벌 수 없게 된다면 슬플 것이라고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융은 이 대화를 듣고 충격을 받아 아버지 서재로 달려가 라틴어 문법책을 펼쳐 공부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여러번 발작 증세가 나타났지만, 융은 포기하지 않고 발작을 극복하고 공부를 하였습니다.
이후 융은 발작증세가 사라졌으며, 이러한 경험은 자신을 엄격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데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3.
프로이트와 융의 관계

프로이트와 융의 관계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를 해봅시다.
처음에는 프로이트와 서로의 연구를 나누며 신뢰적인 관계를 쌓아나갔습니다.
융은 19살이라는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학자 대 학자라는 비교적 대등한 입장에서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교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프로이트와 융은 정신병의 근원에 대한 상반된 주장을 펼쳤고
융이 정신분석학회를 탈퇴하면서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정신분석학회를 탈퇴한 융은 암흑기를 가지며 힘든 생활을 하였지만,
결국 자신의 꿈과 비유대인이라는 장점을 가지고 끊임없이 연구한 결과 분석심리학을 정립하게 됩니다.






4.
융의 아내 '엠마'

융의 정신의학 공부에 많은 도움을 준 여성이 나타납니다.
그 여성이 바로 융의 아내 ‘엠마’입니다.
엠마는 스위스에서 손꼽히는 시계 제조업 IWC의 딸이었습니다.
융과 엠마는 5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엠마는 막대한 유산으로 융의 연구를 지지해주었습니다.
엠마는 프로이트와 서신을 교환하고 정신분석가로 활동할 만큼 지적이고 명석하였습니다.
이후 심리학 교육을 받아 융의 연구소에서 강의를 할 정도 였다고 합니다.





5.
심리학자 융

융의 아버지께서는 정신병원 상담 목사로 활동하였습니다.
그 영향으로 융 또한 자연스럽게 정신분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895년 융의 아버지는 생을 마감하셨고
융은 어머니와 여동생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의무를 떠맡아야 했습니다.

그 해 융은 바젤대학 자연과학부에 입학하여 정신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융은 과학과 인간성을 조합시키는 것에 관심을 가졌으며, 크라프트 에빙의 저서들에도 많은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1900년 12월 바젤 대학 졸업 후 유럽에서 가장 진보적인 정신병원 중 하나인 '취리히대학 부속 부르크흴츨리 정신병원'에 블로일러 교수를 보조하는 보조의사이자 연구원으로 일하였습니다.

이 시기 활발하게 정신의학을 연구하였고, 30세에는 취리히 의과대학의 임상과정이 되어 그 학교에서 정신의학 강의를 하였습니다.






1904년경 융은 정신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정신분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단어연상법을 창시하였습니다.
단어연상법으로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통해 제기한 억압이론을 입증하고 그것을 '콤플렉스'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1906년에는 정신분열증을 이해하는데 정신분석이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1907년에 오스트리아 빈에 살고 있는 프로이트에게 정신분열증에 관한 연구서를 프로이트에게 보냈습니다.
이를 받은 프로이트는 융을 비엔나로 초청해 서로의 연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이를 계기로 친분을 쌓아나갔습니다.

하지만 융은 프로이트의 주장과 상반된 주장을 펼치게 됩니다.
융은 정신병의 근원을 성적인 것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환원주의를 이해할 수 없었고, 리비도가 성적에너지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에 대해 리비도는 일반화된 삶의 에너지라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였습니다.

1914년 정신분석학회를 탈퇴하고 그 이후 자신의 심리학인 분석심리학을 수립하는데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융의 심리학은 일반 심리학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고 융은 3년간 우울증세를 보이며 교수직을 내려놓고 저술 또한 거의 하지 않으며 지냈습니다.

이 시기 융은 여러가지 불가사이하고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에 대규모 재앙에 대한 환상을 보았으며, 유령을 목격하거나 의미심장한 꿈을 꾸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융은 영지주의와 연금술의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무의식의 본질을 탐색하는 과정에 자기 안의 또 다른 인격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고 자신의 내면을 깊숙히 들여다보는 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융의 기록물을 읽은 친구는 "융은 자신이 걸어다니는 정신병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병원 최고의 의사"라고 표현하였습니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이후 제 2차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 프로이트를 비롯한 여러 정신의학자드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망명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융은 스위스 국적인 비유대인이였기 때문에 여전히 그 명성을 유지하며 활동을 지속해나갔습니다.
융이 나치 협력자, 반유대주의자로 여겨졌으나 치 동조자로 모는 것은 옳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1939년 융을 프로이트의 사망소식을 듣고 "프로이트라는 이름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정신사에서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이름"이라고 표할 정도로 프로이트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고 존경을 표했습니다.







1944년 융은 사고로 다리가 부러지고, 심근경색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고를 통해 융은 임사체험을 경험하였으며, 융은 그 상태로 세상을 하직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황홀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1947년 두 번째 심근경색으로 병원 신세를 졌지만, 건강을 회복하고 난 후에는 연구활동을 활발히 하였습니다.

1955년 취리히에서 80세를 맞이한 융을 위해 축하 행사가 펼쳐졌습니다.
하지만 그해 말에 부인 엠마가 사망하였고, 융 또한 급속도록 쇠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61년 6월 6일 저녁, 칼 구스타프 융은 퀴스나흐트의 자택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융이 묘비명을 끝으로 이번 포스팅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르든 부르지 않든 신은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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